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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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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루노 바우어는 1809년 독일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초기에는 헤겔 철학을 따랐으나 점차 헤겔 좌파로 전향하여 종교 비판과 성서 비평에 집중했다. 그는 복음서의 내용을 인간의 창작물로 보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1848년 혁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후 보수적인 역사관으로 변화하여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초기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 신화론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주변적인 이론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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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바우어
기본 정보
브루노 바우어 사진 (1870년경)
이름브루노 바우어
출생일1809년 9월 6일
출생지아이젠베르크,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국
사망일1882년 4월 13일
사망지릭스도르프, 베를린, 독일 제국
국적독일
교육
모교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사상 및 관심 분야
학파합리주의
청년 헤겔학파 (초기)
주요 관심사신학, 정치
영향
영향을 준 인물G. W. F. 헤겔
J. G. 피히테
다비트 슈트라우스
막스 슈티르너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아르튀르 드 고비노
영향을 받은 인물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막스 슈티르너
찰스 다윈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
카를 카우츠키
아르투어 드루스
주요 아이디어
주요 아이디어초기 기독교는 유대교보다 스토아 학파에 더 많은 빚을 졌다.

2. 초기 생애와 헤겔 학도로서의 활동

브루노 바우어는 1809년 9월 6일 작센알텐부르크의 아이젠베르크에서 도자기 채색 장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15년 아버지가 샤를로텐부르크의 도자기 공장에서 화가로 일하게 되면서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3]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베를린 대학교에 진학하여, 당시 독일 철학계를 이끌던 헤겔의 강의를 듣고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충실한 헤겔 학도' 즉, 노(老) 헤겔파로 분류되었다.

2. 1. 베를린 대학교 시절

1815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한 브루노 바우어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1828년부터 1834년까지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했다.[3] 당시 독일 철학계를 이끌던 헤겔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고,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하인리히 구스타프 호토, 필리프 마르하이네케 등에게서도 배웠다. 20세였던 1829년에는 칸트의 미학에 관한 에세이로 헤겔의 추천을 받아 프로이센 왕립 철학상을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3]

1831년 스승 헤겔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바우어는 헤겔 연구를 이어갔다. 1834년 학위를 취득하고 베를린 대학교 신학부 강사로 임용되어 1839년까지 신학과 성경을 가르쳤다.[3] 이 시기 바우어는 스승 필리프 마르하이네케의 영향을 받아 우파 헤겔주의와 연관되었으며, 스스로를 "'''충실한 헤겔 학도'''"로 여겼다. 그는 헤겔 철학에 대해 강의하는 한편, 마르하이네케 등과 함께 헤겔의 ''종교철학 강의'' 제2판 편집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838년에는 첫 저서인 Kritische Darstellung der Religion des Alten Testamentsdeu (구약성서 종교 비판적 고찰)을 2권으로 출판했다.

3. 헤겔 좌파로의 전향과 종교 비판

엥겔스가 그린 풍자화. 아놀드 루게(왼쪽 끝)에게 양손을 벌리고 반박하는 인물이 브루노 바우어이다.


1839년 본 대학교로 이적하여 사강사(私講師)로 활동하면서 브루노 바우어의 사상적 전환이 시작되었다. 그는 1840년 《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s Johannes|요한 복음서 비판de》과 1841년 《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r Synoptiker|공관 복음서 비판de》을 발표하며 기존의 헤겔 우파와 결별하고 헤겔 좌파로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 저작들에서 바우어는 같은 헤겔 좌파 신학자 다비트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1835)에서 복음서를 '신화'로 해석한 것에서 더 나아가, 복음서 내용 자체가 마태오, 마르코, 루카와 같은 저자들의 자기 의식, 즉 헤겔 철학의 '주체적 정신'에 의한 '창작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기독교를 인간 주체의 산물로 더욱 철저하게 규정하는 급진적인 해석이었다. 이러한 초월적 신의 부정과 인간 중심적 입장은 당시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종교 및 정치 체제와 충돌하여, 결국 그가 대학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학에서 해임된 이후에도 바우어는 비판적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1842년 《Die Posaune des jüngsten Gerichts über Hegel den Atheisten und Antichristen|무신론자이자 반(反)기독교인인 헤겔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나팔de》과 1843년 《Das entdeckte Christentum|폭로된 기독교de》를 통해 무신론적 입장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 그는 베를린의 헤겔 좌파 그룹인 "프라이엔"(Die Freien)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포이어바흐, 슈티르너 등과 교류하며 당대의 국가, 정치, 종교 문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주도했다.

한편, 바우어의 사상은 반유대주의 논란을 낳기도 했다. 1843년 그는 『Die Judenfrage|유대인 문제de』를 저술했고, 이는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비판적으로 응답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바우어가 유대인이 처한 사회적 어려움의 책임을 유대인 자신에게 돌린다고 비판했다.[12] 바우어의 유대인 및 유대교에 대한 견해는 그의 반기독교적 입장과 맞물려 복합적인 평가를 받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의 글에서 명백한 반유대주의적 경향을 지적하는 반면[11],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왜곡된 해석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3. 1. 성서 비평



1839년 본 대학교로 이적하여 사강사(私講師)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성서 비평 작업에 착수했다. 1840년 《요한 복음서 비판》(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s Johannesde)을, 1841년에는 《공관 복음서 비판》(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r Synoptikerde)을 발표하며 헤겔 우파와 결별하고 헤겔 좌파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 저작들에서 바우어는 동시대의 신학자 다비트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1835)에서 복음서를 '신화'로 규정한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복음서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마태오, 마르코, 루카와 같은 복음서 저자들의 '자기 의식'(헤겔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적 정신')에 따른 '창작'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기독교를 슈트라우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인간 주체의 산물로 간주한 것으로,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고 인간 중심적인 해석을 강조한 급진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견해로 인해 바우어는 결국 1842년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대학에서 해임되었다.[26]

대학에서 해임된 이후에도 바우어는 성서 비평을 계속 심화시켰다. 《바울 서신 비판》(Kritik der Paidinischen Briefede, 1850-1852)과 《복음서 비판과 그 기원 역사》(Kritik der Evangelien und Geschichte ihres Ursprungsde, 1850-1851)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18]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바우어가 처음에는 예수의 역사성을 인정했으나,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대한 심층 연구를 통해 점차 그 존재를 부정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9]

바우어는 후기 저작인 《그리스도와 카이사르》(Christus und die Cäsarende, 1879)에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기독교가 세네카로 대표되는 스토아주의 철학과 필로의 유대교 신학이 요세푸스와 같은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유대인들에 의해 결합되어 형성된 혼합주의적 종교라고 주장했다.[20]

바우어의 이러한 급진적인 성서 비평과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한 주장은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후대에 그리스도 신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14][21] 그러나 일각에서는 바우어가 예수라는 인물 자체의 실존을 전면 부정한 것이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기적과 전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했던 합리주의 학파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그가 부정한 것은 초자연적 '그리스도'이지,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16][17]

3. 2. 무신론과 기독교 비판



1839년 본 대학교로 이적하여 사강사(私講師)로 강의하던 브루노 바우어는 1840년 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s Johannes|요한의 복음사 비판de1841년 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r Synoptiker|공관복음의 복음사 비판de을 발표하며 기존의 헤겔 우파에서 헤겔 좌파로 사상적 전환을 이루었다. 이 저작들에서 바우어는 같은 헤겔 좌파인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1835년)에서 복음서를 '신화'로 규정한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기독교 복음서의 내용이 마태오, 마르코, 루카와 같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의 자기 의식, 즉 헤겔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적 정신'에 의해 '창작'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기독교를 슈트라우스보다 더욱 철저하게 인간 주체의 산물로 간주한 것이었다.

바우어는 1841년 출간한 『Die Posaune des jüngsten Gerichts über Hegel den Atheisten und Antichristen|무신론자이자 반(反)기독교인인 헤겔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나팔de』에서 무신론적 입장을 더욱 명확히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보편적 자기 의식 획득을 방해한다고 비판했으며, 당시 신성 동맹 체제 하 독일에서의 교회와 국가의 결합을 강하게 비판했다[26]. 이러한 초월적 신의 부정과 인간 중심적 사상은 결국 프로이센 왕국 정부의 탄압을 불렀다. 정부의 검열을 거쳐 바우어는 1842년 봄, 본 대학교 강사직에서 해임되었다[26].

1843년에는 『Das entdeckte Christentum|폭로된 기독교de』를 출간하여 신에 대한 숭배가 인간의 주체적 사고 능력을 상실시킨다고 비판하며, 기독교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역설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정부에 의해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29][26][31]. 같은 해, 사회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인 빌헬름 마르는 『폭로된 기독교』의 축약판을 간행하기도 했다[27] (마르는 훗날 반유대주의를 뜻하는 "반셈주의(Antisemitismus)"라는 용어를 만든 인물이다[31]).

대학에서 추방된 후 바우어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헤겔 좌파 사상가들이 모인 그룹 "프라이엔"(Die Freien, 자유인들)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포이어바흐, 슈티르너 등과 교류하며 당시의 국가, 정치, 종교 문제에 대해 활발히 논의했다.

바우어는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4][15]. 그의 학문적 경력 초기에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고 확신했으나, 일반적인 신학자들이 실제 역사적 예수에게 전설을 덧씌웠다고 보았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 탐구''(1906) 143쪽에 따르면, 바우어는 "우리는 변증론자들이 무력하게 만들었던 예수의 인격을 생명으로 되돌리고, 그에게 역사와 살아있는 관계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예수의 명예를 지켜낸다. 그것은 분명히 그가 가졌던 관계이며,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1841년 『공관복음서의 복음서 역사 비판』에서는 성경 속 예수를 주로 문학적 인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1842년 『복음서의 역사와 요한의 신학에 대한 비판』에서는 복음서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순수한 문학 작품이며, 특히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그는 "역사적 그리스도가 무엇이든, 그에 대해 말해지는 모든 것, 그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은 상상의 세계, 즉 기독교 공동체의 상상력에 속하며, 따라서 현실 세계에 속하는 어떤 사람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썼다[17]. 더 나아가 1850년대에 출간된 『Kritik der Paidinischen Briefe|바울 서신 비판de』(1850-1852)과 『Kritik der Evangelien und Geschichte ihres Ursprungs.|복음서 비판과 그 기원 역사de』(1850-1851)에서는 역사적 예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18][19]. 그의 후기 저작인 『그리스도와 카이사르』(1879)에서는 기독교가 세네카의 스토아주의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신학을 요세푸스와 같은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유대인들이 결합시켜 만들어낸 것이라는 독자적인 기원론을 제시했다[20].

바우어는 당대의 다른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독일 가톨릭 운동을 일으킨 실롱스크의 사제 요하네스 롱게(Johannes Ronge)에 대해, 이성을 구원자로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유로운 성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26]. 또한 프로테스탄트 내의 자유 게마인데(Gemeinde, 공동체) 운동에 대해서도, 기존 영방 교회 제도를 비판하지 않고 "사랑과 진리" 같은 공허한 구호만 반복하며 성서의 자유로운 연구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26].

바우어의 급진적인 기독교 비판과 예수 역사성 부정론은 당대에 큰 논란을 일으키며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14][21], 결국 그를 학계에서 추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이후 그리스도 신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화론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신약의 역사적 가치 부재, 1세기 비기독교 문헌에서 예수에 대한 언급 부재, 기독교의 혼합주의적 기원 등의 주장은 상당 부분 바우어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22]. 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이 바우어의 실제 저작에서 발견되는 뉘앙스를 간과한다고 지적하며, 바우어가 갈릴리 출신 예수라는 인물 자체의 존재를 부인했다기보다는 복음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행적과 신화적 요소들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우어는 1850년대 이후에도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 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계속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29][28].

3. 3. 헤겔 좌파 그룹 활동

아놀드 루게(왼쪽 끝)에게 양손을 벌리고 반박하고 있는 인물이 브루노이다.]]

1839년 본 대학으로 이적하여 사강사(私講師)로 강의했으며, 1840년 "요한의 복음사 비판"(''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s Johannes'')과 1841년 "공관복음의 복음사 비판"(''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r Synoptiker'')을 발표하며 헤겔 우파와 결별하고 헤겔 좌파로 입장을 전환했다. 이 책들에서 바우어는 같은 헤겔 좌파인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1835년)에서 복음을 '신화'로 본 입장에서 더 나아가,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공관 복음서 저자들(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자기 의식, 즉 헤겔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적 정신'에 따른 '창작'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는 슈트라우스보다 기독교를 인간 주체의 산물로 더 강하게 간주한 것으로,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고 인간 중심적인 입장을 취한 이 저작들로 인해 바우어는 결국 대학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바우어는 "무신론자이자 반(反)기독교인인 헤겔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나팔"(1842년)과 "폭로된 기독교"(1843년)를 통해 무신론적 입장을 더욱 분명히 했다. 그는 베를린의 헤겔 좌파 그룹 "프라이엔"(Die Freien)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포이어바흐, 슈티르너 등과 교류하며 당시의 국가, 정치, 종교 문제에 대해 활발히 논의했다.

그러나 1848년부터 일부 비평가들은 바우어가 출판물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조장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11] 일부 학자들은 바우어의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견해가 과거와 현재 모두에서 절대적으로 부정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반면, 트레호와 같은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비난이 근거가 부족하며, 카를 마르크스 자신이 유대인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에서 바우어의 반유대주의적 주장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마르크스 자신의 반유대주의 혐의를 피하려는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이러한 비난이 조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843년 바우어는 『유대인 문제』(Die Judenfrage|디 유덴프라게de)를 저술했고, 이는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반박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바우어는 유대인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숨구멍과 틈새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유럽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2]

역사학자 야콥 카츠는 바우어의 반유대주의를 그가 교수직을 잃게 만든 원인이기도 한 열렬한 반기독교주의와 연결지어 설명한다. 카츠에 따르면 바우어는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 대해 참을성이 없었"지만, 유대인 작가나 사상가에 대한 비평에서 종종 "전형적인 유대인"에 대한 일반화로 나아가 부정적인 특성들을 부각시키려 했다.

트레호와 같은 학자들은 바우어가 한편으로는 "열정적인 반기독교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우익 기독교인으로 비난받는 모순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바우어를 비판하는 두 권의 책에서 그를 우익 헤겔주의자로 묘사했으며, 로렌스 스테펠레비치와 같은 번역가 및 일부 학자들은 바우어의 '헤겔, 무신론자이자 적그리스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의 나팔'(1841)이 헤겔에 대한 진지한 우익 기독교적 항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바우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일관성이 부족하고 상호 모순적인 면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우어를 명백한 반유대주의자로 비판한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레오폴드는 "브루노 바우어의 헤겔주의적 반유대주의"[13]라는 논문에서 헤겔과 바우어 ''모두''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바우어는 1863년 소책자 『외국에서의 유대교』(Das Judentum in der Fremde|다스 유덴툼 인 데어 프렘데de)에서 유대인 독자들에게 평균적인 독일인이 자신의 권리를 얻을 때까지 독일 내 유대인의 권리 요구를 기다려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4. 유대교와 유대인 문제

바우어는 1843년 《유대인 문제》라는 저작을 통해 당시 사회적 쟁점이던 유대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는 이 책에서 유대교의 특성과 유대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분석을 제시하며, 기존의 유대인 해방 논의에 대해 독자적인 관점을 피력했다.[29][30][31]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19세기 반유대주의 담론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하기도 한다.[29]

4. 1. 유대인 문제에 대한 입장

1843년, 바우어는 《폭로된 기독교》를 발표한 해에 《유대인 문제》라는 저작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유대인이 겪는 사회적 압박의 근본 원인이 유대교 특유의 편협한 민족 정신과 율법 중심주의에 있다고 분석했다. 바우어에 따르면, 유대교의 경직된 의례와 규범은 유대인들을 역사의 보편적 흐름에서 소외시키고 다른 민족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29][30]

그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공상적인 민족성'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기독교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해방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29][30] 더 나아가 바우어는 유대인들이 시민 사회의 구조적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보편적 인권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수용하지 않으며, 금융과 정치 영역에서 과도한 권력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29][31]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바우어는 당시 논의되던 유대인 해방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보편적 해방의 관점에서, 유대인만을 특정한 해방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며 반론을 제기했다.[31] 에른스트 발니콜(Ernst Barnikol)과 같은 후대의 연구자는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를 19세기에 등장한 반유대주의 담론 중 가장 지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을 담은 저작으로 평가하기도 했다.[29]

4. 2. 반유대주의 논란

1843년, 그는 《폭로된 기독교》를 발표한 같은 해에 《유대인 문제》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바우어는 유대인이 겪는 압박의 원인이 유대교의 편협한 민족 정신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율법이 명하는 어리석은 의례가 유대인을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른 민족과 격리시킨다고 보았다. 바우어는 유대인이 "공상적인 민족성"에 집착하는 한 해방될 수 없으며, 이는 기독교가 특권을 유지하려는 한 해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29][30]

또한 바우어는 유대인이 시민 사회의 틈새에 기생하며 불안정한 요소로부터 이익을 취하고, 보편적 인권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금융과 정치에서 과도한 권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29][31] 그는 모든 인간이 종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보았기에, 유대인만을 해방 대상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며 유대인 해방론에 반론을 제기했다.[31] 발니콜(Valnicole)은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를 19세기의 가장 지적이고 날카로운 반유대주의 저작이라고 평가했다.[29]

5. 1848년 혁명에 대한 비판과 후기 활동

1848년 3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브루노 바우어는 혁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헤겔 철학에 기반하여 혁명 참여자들을 불완전한 의식을 가진 '대중'으로 보았으며, 혁명의 결과물인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역시 과거 체제를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26] 또한 혁명 자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29]

특히 바우어는 혁명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유대인 정치가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현하며, 점차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였다. 그는 유대성을 종교가 아닌 인종적 문제로 규정하는 등 인종차별적인 주장까지 펼쳤다.[29][32]

1848년 혁명을 기점으로 헤겔 좌파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바우어는 이후 정치 및 역사 분야의 저술 활동에 집중했다. 『독일 시민 혁명론』(1849년), 『러시아와 게르만』(1853년), 『그리스도와 황제들』(1877년) 등 다수의 저작을 통해 유럽 사회와 기독교를 비판했으며, 비스마르크디즈레일리 같은 정치 지도자들을 분석하며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러한 후기 활동을 통해 바우어는 초기 급진적인 사상가에서 점차 보수적인 문화 철학자로 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1. 1848년 혁명에 대한 소극적 입장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바우어는 혁명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헤겔 철학에서 말하는 '보편적 자기 의식'의 완전한 실현을 중시했는데,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불완전한 의식을 가진 '대중'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혁명 다음 해인 1849년에 발표한 『독일 시민 혁명론』에서 바우어는 독일 3월 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시민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왕과 타협하고 노동자 계급을 배제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혁명의 결과물인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역시 과거 독일 연방의 연방 의회를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며, "독일 시민"들이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26]

바우어는 혁명 사상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는 "혁명은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그것은, 낡은 피의 비등, 역사의 하층의 퇴적물의 노출, 새로운 시대 속으로의 고대의 침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혁명이 진정한 사회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고 보았다.[29]

특히 바우어는 1848년 혁명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유대인 정치가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부의장 리사, 치안 위원회 의장 페슈호프, 지몬 의원, 야코비 의원 등 유대인들의 활동을 언급하며[29][32], 이들이 독일 민족을 대표할 자격이 없으며 혁명을 통해 유대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고 비판했다.[29] 바우어는 유대인들이 혁명에 기대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뿐이라고 주장했다.[29]

이러한 인식은 점차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바우어는 유대적인 모습(Judentum|유덴툼de)을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종적인 성질로 규정했다. 그는 유대인이 신체적으로 열등하며(평발, 약한 하반신 등) "하얀 니그로"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인종차별적인 주장을 펼쳤다.[29] 또한 "우리는, 독일의 노고와 독일의 피로써 세워진 독일 국가 안의 독일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독일 국가의 이름을, 세계에서 가장 불량한 자들의 갱생 시설로 빌려줄 생각은 절대로 없다"고 말하며,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성향을 명확히 드러냈다.[29] 바우어에게 유대적인 모습은 기독교 세계를 획일화하고 의회를 장악하려는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29]

5. 2. 보수적 역사관으로의 변화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나자, 바우어는 헤겔 철학의 '보편적 자기 의식' 개념에 입각하여, 불완전한 자기 의식으로 혁명에 참여하는 이들을 '대중'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헤겔 좌파는 사실상 소멸했고, 바우어는 정치 및 역사 분야의 저술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혁명 이듬해인 1849년에 발표한 『독일 시민 혁명론』에서 바우어는 3월 혁명 당시 시민 계급이 국왕과 타협하며 노동자를 배제했고,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역시 구체제의 연방 의회를 답습했을 뿐이라고 비판하며 '독일 시민'들이 사고 능력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26]

또한, 바우어는 1848년 혁명에서 유대인 정치가들의 활약[29][32]을 지적하며, 이들이 독일의 역사를 대신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혁명은 새로운 것을 낳지 않는다... 낡은 피의 비등, 역사의 하층 퇴적물의 노출, 새로운 시대 속으로의 고대의 침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혁명 사상 자체를 비판했고, 유대인들이 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고대적 특성만을 추구한다고 보았다.[29] 이 시기 이후 그의 반유대주의적 사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바우어는 유대성(Judentum)이 단순한 종교를 넘어 인종적 성질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을 들어 '하얀 니그로'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 국가를 유대인의 갱생 시설로 내줄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29], 유대성을 '현대 세계의 위력', '기독교 세계의 균일화', '의회 결정의 당파적 장악' 등과 동일시했고, 기독교 정치가들 역시 그 일부로 보았다.[29]

헤겔 좌파 소멸 후, 바우어는 헤르만 바그너의 '국가·사회 사전' 편찬에 협력하고, 『러시아와 게르만』(1853년), 『러시아와 영국』(1854년) 등 정치·역사 저작을 활발히 집필했다. 1853년 『러시아와 게르만』에서는 1848년 혁명 이후 유럽이 분열과 대립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영국의 디즈레일리, 프랑스의 풀드 등 유대인 정치·경제인들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863년 『이국의 유대』에서는 독일이 유대인에게 지배당하는 책임이 유대인을 동등하게 대우한 기독교도, 특히 독일인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의 책임이기에,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리스도와 황제들』(1877년)에서는 기독교가 로마 제정 시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를 기반으로 탄생했다고 주장하며, 당대 사회를 유대교가 승리했던 초기 로마 제정 시대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만년에는 『비스마르크 시대에 관한 안내서』, 『디즈레일리의 낭만주의적 제국주의와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적 제국주의』 등을 저술하며 유럽 세계의 붕괴라는 인식을 드러냈고, 비스마르크와 디즈레일리를 논하며 반유대주의 잡지 창간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후기 활동을 통해 바우어는 초기 헤겔 좌파 시절과는 다른 보수적인 문화 철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6. 바우어 사상의 영향과 현대적 의의

브루노 바우어의 사상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지성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청년 헤겔주의자 그룹 내에서의 활동과 급진적인 성서 비판은 이후 등장하는 여러 사상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카를 마르크스, 막스 슈티르너,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며, 근대 독일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4][12]

바우어의 예수 역사성 부인과 같은 기독교 신화론 주장은 학계의 주류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성서 비판 방법론 자체는 후대의 신학 및 종교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9][10] 비록 그의 사상이 논쟁적이고 때로는 극단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기존의 권위와 통념에 도전했던 그의 비판 정신은 현대에도 여전히 지적인 자극을 주는 측면이 있다.

6. 1. 후대 사상가들에게 미친 영향

브루노 바우어는 카를 마르크스, 막스 슈티르너, 프리드리히 니체 등 후대의 주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카를 마르크스와는 1839년부터 1841년까지 교사, 멘토, 가까운 친구 관계였으나[4],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결별했다. 바우어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4]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우어와의 결별을 《성가족》(1845)과 《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표현하며 그를 비판했다.[4] 특히 바우어가 1843년 《유대인 문제》를 저술하자,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라는 소책자를 통해 바우어의 견해를 반박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어는 초기 마르크스의 사상적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헤겔 좌파 내에서 마르크스와 가장 가까운 입장을 공유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바우어는 젊은 니체에게 다비트 슈트라우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기사를 쓰도록 격려했으며, 니체는 초기 시절 바우어를 "자신의 모든 독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바우어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던 고독한 시절의 니체를 알아본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또한 바우어는 고독사한 사상가 막스 슈티르너의 유해를 거두어 매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바우어는 마르크스, 슈티르너, 니체로 이어지는 근대 독일 사상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바우어의 기독교 신화론은 그의 사후 알베르트 칼토프와 아르투어 드레브스 등에 의해 재조명되기도 했으나, 학계에서 주류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바우어의 초기 성서 비판 작업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후기의 예수 역사성 부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9][10]

7. 주요 저작


  • 1829년: De pulchri principiis|미의 원리에 관하여la (프로이센 왕립상 수상작)
  • 1838년: Kritische Darstellung der Religion des Alten Testaments|구약성서 종교 비판적 고찰de, 2권
  • 1840년: 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s Johannes|요한 복음서의 비판de
  • 1841년~1842년: 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r Synoptiker|공관 복음서의 비판de, 2권
  • 1841년: Die Posaune des jüngsten Gerichts über Hegel, den Atheisten und Antichristen|헤겔, 무신론자, 적그리스도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나팔de
  • 1843년: Das Entdeckte Christentum|폭로된 기독교de (출간 직후 금서 처분됨)
  • 1843년: Die Judenfrage
  • 1843년~1845년: Geschichte der Politik, Kultur und Aufklärung des 18. Jahrhunderts|18세기의 정치, 문화 및 계몽주의의 역사de, 4권
  • 1846년: Geschichte Deutschlands und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unter der Herrschaft Napoleons|나폴레옹 치하의 독일과 프랑스 혁명의 역사de, 2권
  • 1850년~1852년: Kritik der Evangelien und Geschichte ihres Ursprungs|복음서 비판과 그 기원 역사de, 4권[6]
  • 1850년~1851년: Kritik der paulinischen Briefe|바울 서신 비판de[7]
  • 1853년: Russland und das Germanentum|러시아와 게르만주의de, 2권
  • 1854년: Russland und England|러시아와 영국de
  • 1877년: Christus und die Caesaren|그리스도와 카이사르de
  • 1882년: Disraelis romantischer und Bismarcks socialistischer Imperialismus|디즈레일리의 낭만주의와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적 제국주의de

참조

[1] 문서 Christus und die Caesaren
[2] 서적 Caesar and Christ Simon and Schuster 1972
[3] 간행물 Bruno Bauer https://plato.stanfo[...]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23-07-27
[4] 논문 The Influence of Bruno Bauer on Marx' Concept of Alienation 1970
[5] 서적 Perfektionismus der Autonomie Brill, Fink 2019-11-07
[6] 서적 Kritik der Evangelien und Geschichte ihres Ursprunges https://books.google[...] Gustav Hempel 2024-06-21
[7] 서적 Kritik der paulinischen Briefe https://books.google[...] Gustav Kempel 2024-06-21
[8] 논문 David Friedrich Strauss and His Hegelian Critics https://www.jstor.or[...] 1977
[9] 서적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https://books.google[...] Fortress Press 1906
[10] 문서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06
[11] 서적 The Philosophy and Politics of Bruno Bau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12] 서적 The History of Anti-Semitism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3
[13] 논문 History of European Ideas
[14] 서적 Jesus Outside the New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the Ancient Evidence Eerdmans Publishing 2000
[15] 문서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https://books.google[...]
[16] 서적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https://archive.org/[...]
[17] 서적 Kritik der evangelischen Geschichte der Synoptiker https://books.google[...] O. Wigand
[18] 문서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Fortress 2001
[19] 서적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https://archive.org/[...]
[20] 서적 The Philosophy and Politics of Bruno Bau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21] 서적 In Search of Jesus: Insider and Outsider Images Continuum 2001-12-01
[22] 서적 Jesus Outside the New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the Ancient Evidence https://books.google[...] Wm. B. Eerdmans Publishing
[23] 서적 Die Leugnung der Geschichtlichkeit Jesu in Vergangenheit und Gegenwart. Karlsruhe 1926 https://books.google[...] G. Braun
[24] 웹사이트 The Denial of the Historicity of Jesus in Past and Present http://www.egodeath.[...] Michael Hoffman
[25] 웹사이트 Fuller Reply to Richard Carrier https://ehrmanblog.o[...] 2018-05-02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서적 Bruno Bauer. Studien und Material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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